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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에서
39년을 살면서
돌아다닌 흔적들,
살아본 도시들, 그리고
여행 다녔던 갔던 기억들...
부산 - 군산 - 부산 - 울산 - 광명
- 서울 - 수원 - 구미 - 익산 - 온
양 - 원주 -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기도 과천에 살았던흔적,
그리고 1998년 IMF를 혹독
히 겪은 후 멀리 떠남. 한국
시절의 추억은필카
사진을 스캔해야
하므로 아무래도
올 겨울 이후로
작업 할 시기
가 밀려
날거같
다
.
내가 명품 하나도 없이 수수하게 인생을 살아왔지만 딱 하나 꼿히는게 몽블랑 만년필이야.
아직 볼펜 하나 쓰고 있고 만년필은 고장나 안쓰고 다른 만년필은 세개쯤 있지.
내가 글을 끄적이는 걸 좋아해서 필기구에 대한 집착이 좀 강하기는 하지.
나의 몽블랑 만년필 이야기는 78년으로 거슬로 올라가지.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시거나 하시면 집에 몽블랑 만년필을 몇개씩 가져오시곤 했어.
그때 내나이 16살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필기구로 알았던 거야.
서랍에 한때 세자루가 넘게 있었던 적도 있었고.
버스 타려다가 가방에서 떨어졌는데 무시하고 버스를 탄적도 있었어.
근데 그게 얼마나 비싼 필기구 였는지를 알게 된건 82년도 대학교 축제때 였어.
그때도 가슴에 한자루 꼿고있었는데, 축제 페스티벌 사회자가 이런 말을 하는거였어.
여자들 한테, 남자 고르려면 가슴에 몽블랑 정도는 꼿고 다니는 넘을 잡아야지 ….
그때 난 그게 뭐가 대순데… 그랬지. 옆에 있었던 파트너 여자는 내 가슴에 꽂혀있던게 몽블랑이란 걸 모르고 있었고.
그 이후 아빠는 회사를 옮기시게 되었고, 더이상 몽블랑을 집으로 가져오시지 않았어.
그러다가 2011년경 한국을 방문할때 공항에서 거금 $640불을 주고 산 것이 얼마전 까지 쓰던 만년필이었지.
아빠가 유럽에서 원자력 관련 기술자 훈련을 담당하고 계실때 약 600명 정도를 프랑스에서 훈련을 시키셨고, 그 훈련자에 포함되기 위한 직원들의 사투는 거의 몸부림에 가까웠던 것 같아.
당시 해외 여행이 어려웠고, 비행기 요금만 일년치 월급에 다다를때 회사에서 유럽에 보내 준다것.
6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숙식을 제공하며 가족도 방문을 허락하면서 훈련을 받고 돌아가면 당시 원자력 발전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던 시기였거든.
그래서 아빠한테 잘보이려는 엄청난 활동들이 있었고, 설날이나 추석때면 우리집 상도동 아파트 방 하나를 과일 상자를 쌓아두기 위해 방을 비워야 할 정도였어.
왜 그렇게 과일 상자가 많았냐 하면, 아빠가 일절 청탁을 거절했기 때문이였어.
얼마전 한 직원이 금 돼지 한마리를 박스에 이쁘게 포장해서 가지고 왔었어.
한국 사람 체면상 앞에서 바로 뜯어보시지 못한 아빠가 바로 쫗아 나가 그넘을 잡아다가 혼쭐을 내주고 돌려 보냈지.
그 이후 아빠는 과일 이외에는 일절 선물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어.
근데 얼마 후 어느 직원이 감사의 뜻으로 몽블랑을 선물했던거 같아.
그 이후 아빠가 딴건 안 받아도 만년필은 받더라는 소문이 났었나봐.
그때 부터 집에 매달 한두개 꼴로 만년필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아빠는 그때 그게 그렇게 비싼 것인지 모르셨던 거야.
그래서 당시 거의 모나미 153 수준으로 만년필을 홀대하면서 썼던 시절이 있었던 거지.
1982년, 박정희시해 사건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에 구테타 인증을 받으러 간적이 있었지.
그때 미국의 지시로 원자력회사를 국유화하라는 명령을 받은거였어.
그 이전엔 회사가 개인 회사였는데, 당시 과기처 장관이던 정근모 박사를 사장에 영입하면서 국유화에 반대하던 아빠가 직위해제가 되었지.
뇌물을 받았다던 누명을 씌워서.
아빠가 바로 다음 다음 사장을 할 차례셨거든.
지금 그 회사는 한국전력 기술 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꿔 한국의 모든 원자력, 화력, 수력발전소 설계, 건설을 총괄하는 회사로 되어 한때 꿈의 직장이기도 했지.
그 이후 한번 반짝 재기를 하셨다가, 한때 정부에 미운털 박힌 사람 왕따 시키는 분위기로 도움도 못받고 결국 부도, 살던 집에서 다 털고 나와 돌아가실때까지 반지하에서 살다 가신 아빠를 생각하며 어젠 하루 종일 우울했던 하루였어.
하지만 그 아빠의 신앙심, 결벽에 가까운 청렴성으로 일관된 생애의 기록은 내 몸속에 아주 진한 피로 남아 잘 흐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