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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우엔지니어링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일부 일하지 않던 시기 몇 주를 제외 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오고 있는 내 다이어리.
입사전 재수시절 우연히 아버님으로 부터 받게된 손 다이어리가 기록의 시작이다.
어떤 이는 디지털 시대에 검색이 뒤떨어지고 보관성도 나쁜 종이를 왜 아직 고집을 하는지 묻기도 한다.
현재 쓰고있는 (사진 맨 우측) 다이어리의 번호는 #37-65이며 37년차, 일련번호 65를 의미한다.
좌측 80~87은 입사 전에 기록한 수첩으로 일련 번호에 포함은 되지않는다.
..재수 시절부터...1980, 1981, 1982, 1984, 1985, 1987 이렇게 여섯권이 보관되어 있고 (1983, 1986은 분실 또는 어디 쳐박혔는지 35~38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슴).
여긴 재수시절부터 대학시절, 방위시절, 복학후 취직까지 전체 8년간의 기록이 저장되어있다.
1988년 초 사회에 첫발을 디딘 초년생의 긴장은 몇달 지속되지 않았다.
대학생활을 통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속물적인 사회 생활에 점점 적응하기 힘든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근때 엘리베이터에서 고참 둘을 만났는데 하는 짓들이 가관이다.
둘이 눈이 마주 치더니 하나-둘-셋 하면서 넥타이를 서로에게 까보이면서 브랜드를 자랑한다.
한두번 해본 짓들이 아니다.
한넘은 지방씨, 한넘은 피에르 가르뎅….
그러면서 서로 고급 브랜드라고 우긴다.
이 모습이 한동안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몇일 후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여기서 내 운명을 가른 사건이 발생한다.
새로 00부에 입사한 4명의 신입사원을 환영하기 위한 술자리서 큰 사고를 치고 만다.
술이 몇순배 돌고 얼굴에 술기운이 심하게 오른 가운데, 앞자리에 앉은 고참 과장(차장을 눈 앞에 둔)이 또 넥타이 자랑질을 시작한다.
기억에 챨스 조르당인지 뭔지 “C”자로 시작하는 로고를 보여준다.
그래서 대뜸 “청계천”이라고 감히 신입사원이 외쳐댔다.
순간 좌중은 싸해졌고, 그 고참 과장의 일그러진 표정….
그 이후 사소한 시비로 술판은 완젼 개판이 됬으며, 되도 않는 고성와 언성이 높아지며 결국 몇몇 고참과 멱살잡이까지 이어졌고...
2차를 나와 3차를 가는 길에 일행들에게 결국은 버려지게 된다. 아마 그 넥타이 과장의 딸랑이 들이 개또라이 제거 작업에 들갔던 것으로 후에 상상을 했었다. 그후 12차선 여의도 대로에서 길에 뛰어들며 택시를 잡으려고 휘청 거리다가 자빠져 안경이 깨지며 얼굴이 까지고…
다음날 출근한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한동안 자성의 모습을 보이며 설설 기는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결국, 다음해 초에 생긴 노조 가입으로 말미암아 “기전”본부로 좌천이 되는 상황으로 연결이 되고 만다.
입사 일년차 초입에 친 사고에 대한 결실이 결국 이년차를 맞아 두달만에 이루어 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불고 있던 사무직 노조 운동이 여의도에 거세게 몰아쳐서 대림엔지니어링이 크게 치고 나가면서 같은 지역에 있던 우리 회사도 2월 초 노조가 설립이 되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 초기 시절, 올림픽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발전상에 맞추어, 대외적으로 민주화된 나라라는 미화책의 일환으로 노조를 허용하는 분위기기 조성되기 시작됬다.
겉은 그랬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설계본부를 시작으로 폭풍같은 노조 가입 바람이 불었는데, 상대적으로 제도사가 많은 배관부, 기계부, 전기부에서 가입 숫자가 크게 증가했고 토목, 건축부가 그 뒤를 따랐고 부서장이 카리스마틱 했던 계장부와 제도사가 적은 공정부는 주저주저하면서 눈치를 보고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소에서 일감이 떨어지며 엔지니어링으로 사내전보 발령을 받으신 성희재 대리(고인이 되셨다)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퇴근시 한잔씩 꼭 하고 헤어지는 사이였는데, 생각이 맞아떨어진게, 공정부와 같이 연합을 해서 노조 가입을 독려하는 공고문을 붙이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다음날 저녁 지하 주차장에서 공정부 일부 생각이 유사한 직원들과 회의를 열어서 합의를 봤다.
공고문 작성은 서울대를 나오신 유식한 성대리께서 쓰셨고 내가 신입사원 초기에 배운 글씨체로 10장의 대자보를 썼으며, 다음날 10층부터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는 동안 잽싸게 옆 공간에 붙이면서 1층까지 내려오는 계획을 세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10층부터 내려오면서 대자보를 붙여오다가 7층에서 당시 부서장을 맞닥드리게 되었고, 우리의 행동을 막는 자체가 사실 불법 노조탄압에 해당되는 행위여서 말리지는 못하고 언짢은 모습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벽보를 붙이고 1층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물론 총무부에서 나서서 불과 한시간 이내에 다 찢어 발겨버리고 말았지만.
이 일이 있고나서 불과 2주후 전사적인 조직 개편이 일어났는데, 노조 가입이 가장 않은 설계본부 전체를 3개 사업부(화공, 에너지, 기전)로 나누어 조직을 와해 시키는 것이었다.
사업부 배치 기준은 나름대로 있었는데, 당시 담당하고 있는 설계에 따라 배치를 한다는 기준이었고 당시 화공 설계를 하고있던 나와 성대리도 자연히 화공 사업부로 갈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나는 기전본부로, 성대리는 에너지본부로 배치를 내린 것이었다.
기전은 사실 당시 설계의 내용으로 따지면 화공, 에너지에 비해 정말 하찮게 여기던 분야였고, 그야 말로 좌천 중에 좌천에 해당하는 배치였으며, 최소 3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였으나 아무도 가기를 꺼리는 바람에, 당시 과장중 가장 힘이 적었던 이용로 과장 한명과 신입사원인 내가 발령이 난 것있다.
사실 지나고 나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바로 기전으로의 발령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으므로, 이후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된 된후, "오랜 기간 준비하신 놀라우신 손길"이었다고 몇번이나 간증을 하게되었고….
이것이 바로, 홈페이지를 만들게된 가장 큰 비중이 되는 내 인생의 사건중의 사건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경험과 사건들이 신비하리 만치 서로 연관이 되면서, 그렇게 힘들었던 모든 프로젝트의 상황과 경험이 나중에 어떻게 활용이 되어, 캐나다에서, 필리핀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새롭게 취직이 되었다거나, 어떤 조직에서 다 짤리고 혼자만 살아 남았다거나, 도저히 연결이 될거 같지 않은 취업 상황에서 새로운 곳에 발령이 났다거나 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기대하시라.
큰 줄거리로 보면:
이 모든 과정의 씨앗이 바로 기전으로의 좌천으로 비롯되었다는 놀라운 사실.
1989년 가을 구미 현장으로 파견된 이후 새내기의 현장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새해를 맞아 부산에서 중학교 시절 동내 친구였던 조재현이 대우전자 구미 공장에 다닌다는 반다운 소식을 알게되어 자주 만나 구미 시내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어느날 새벽 2시경까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는 바로 그 순간 좁은 도로를 폭주하며 달려오는 소나타를 피하다가 뒷바퀴에 발이 밟히고 만다.
술이 번쩍 깨면서 바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소나타는 나를 밟은 사실도 모른채, 코너를 한번 돈 후에 정차를 했고, 바로 다짜고자 차문을 열고 운전자의 턱을 2~3회 가격했으며...
이때 내가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쫗아 달려온 조재현이 가세하여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그 운전자는 어지간히 술이 취한 상태였으며 우리 둘이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주먹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하기만 하다가 어느 가게 쇼윈도에 몸을 던져 팔에 유리를 긁으며 자해를 했으며...
그 모습이 너무 황당하여 그냥 자리를 뜨고 말았는데..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뒤에서 우리를 불러 세웠고, 이후에 발생한 일이 뭔지도 모른는 상태에서 파출소로 끌려가게 되었다.경찰을 통해서 알게된 사실은, 그 쇼윈도에 뛰어든 운전자는 외항선원이었으며, 내일 출항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데없이 나타난 두명에게 이유도 모르고 폭행을 당했으며, 방어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넘어지면서 쇼윈도 유리창이 깨지면서 다쳐서 넘어졌다는데...
일단 밤이 늦어 차후에 재조사를 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바로 그 운전자의 음주 운전 사실을 고발하고 알콜측정을 하도록 주장을 했어야 한다는 사실.
바로 다음 날 운전자의 보호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와 같이 어느 다방에서 그를 만났는데, 딱 봐도 조폭(앙드레김 무늬가 들어간 흰색 자켓, 올백, 금목걸이, 금반지 차림)이었으며, 아주 단호한 어조로 우리 둘을 "집단 폭행"으로 고발을 하겠다고 한다.
내가 차에 발이 치였고 뭐고를 떠나, 일단 피해자는 두명에게 폭행을 당했으며 방어를 위해 몸을 피하다가 쇼윈도 유리창이 깨니면서 전치 4주의 상해를 입고 출항을 못하게 되었으니 보상을 하지 않으면 고발을 하겠단다. 보상금으로 300만원과 병원에 찾아가서 사과를 할것을 또한 요구했다.
당시 월급 30만원 받던 시절 300만원은 10개월치 급여(둘이 나누어도 5개월치 급여)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으며, 현재로 환산을 하면 대졸 3년차 급여가 400만원 정도 한다면 4000만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돈을 떠나, 나는 교통사고 피해자란 사실을 들어 맞고소를 해서 싸우려고 하는 반면, 친구 조재현은 다음주에 예정된 해외 출장과 그에 따른 회사로 부터의 불이익이 두려워 돈을 주자고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내 입장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입사 이제 겨우 2년이 지난 사원이 현장에 와서 폭행과 관련 파출소에 불려다니며 형사고발 위기에 처한 상황에 현장 소장으로부터 엄청나게 깨진 상태에서 맞고소로 계속 일을 뒤로 하고 불려다니고 한다는 상황...
결국 눈물을 머금고 150만원을 마련했다.
서울 처형을 통해서 급전을 구해서 보상금을 전달하고 합의서를 씀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게 되었으며, 현장에서는 신입사원 하나가 내려와서 조폭 깡패소굴인 구미 시내에서 주먹질이나 하는 철딱서니도 없고 겁도 없는 넘이라고...
그렇게 첫번째 현장을 마무리하고 상경을 하게 됬다.
막상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니 갈곳이 없어졌다. 구미로 내려갈때 있었던 상도동 집 내방이 부모님께서 집을 팔고 성남시 은행동 산골짜기로 이사를 가시며 집을 줄여가시는 바람에 방이 없어진 거다.
그래서 당시 조재현이 임시로 군포 대우전자 근처에 방을 하나 빌려쓰고 있던 시절 잠시 그 방에 기생을 하기로 하고 이삿짐을 옮겼다.
주인은 혼자사는 60대 후반 노인이었는데, 처음엔 짐짓 눈치를 주는 듯하다가 아무 말이 없어 더부살이를 허용하는 듯했지만 이내 이틀이 못가서 온갖 싫은 잔소리를 사사건건 들어야 하는 상황에 재현이도 눈치가 보였는지 나가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당장 돈이 없어 월세방도 구하기 힘들고 하던 차에 당시 영임와 언니가 일을 시작했던 레코드가게 다락방에 약간의 공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망원동 상아레코드”로 이삿짐을 옮겼다.
새로 불어난 이삿집은 구미에서 생긴 대우전자 오디오셋트 (연말 보너스로 받음), 첼로, 책과 레코드 네박스, 옷가지 큰 가방 한개가 전부였지만 옮기는 것은 별도 차를 대절을 해야 했다. 사실 이런 자세한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해 8월부터 다음해 결혼을 해서 이리로 내려갈때 까지10개월 동안 상아레코드 다락방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다락방은 앉으면 머리가 살짝 닫는 높이로 잠만 겨우 잘수 있는 곳이었지만 나름 결혼전 일종의 준비기간으로 삼고 좁고 미어터진 곳에서 영임이, 정은이 이모, 나 이렇게 셋이서 생활을 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다락방과 가게에 대한 사진은 별로 없다.
십여년이 지난후 한국 방문때 그 가게터를 한 장 사진으로 남겨왔다.
지금 네이버 스트릿뷰에서 보면 닭갈비 집으로 뀌어있다. 사진은 별도 앨범에 담겠다.
그때 정은이 이모에게 진 신세(주먹질로150만원 꾼거 이후)를 지금 캐나다에서 갚고 있다고나 할까 ㅋ. 인생은 주고 받고 또한 돌고 돈다.
기다리고 있던 다음 프로젝트는 이리(현재 익산)시에 위치한 동양제과 공장이었다.
지금은 안경점으로 바뀌었는데, 1989년 시절 왼쪽은 건물 주인이 운영하는 삼겹살 집, 가운데는 수족관이었다. 이증에 가건물 처럼 보이는게 내가 살던 셋방이었다. 오른쪽 안경이 그려진 왼쪽이 올라가는 문이었다. 아..기억이 새롭다.
쵸코파이로 유명한 동양제과 설계를 마치고 현장으로 가야할 시기가 다가오며 더는 현장에서 철없이 술판에 싸움판을 벌일수는 없는 나이가 되어가며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여행 직후 짐을 꾸려 이리로 내려가서 현장 업무를 시작했다.
거칠고 막무가내인 구미와 또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리에서 현지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과 많은 부딧힘이 발생했는데…
생산 설비를 시공하면서 생긴 어의 없는 이야기를 한개 하자.
외국에서 도입하는 생산 설비에 같이 공급된 컨트롤 밸브가 있었는데, 이것을 별도 창고에 숨겨두고 우리회사에게 강제로 공급을 하도록 지시를 했다. 아무리 계약에 없다고 서류를 갖다 밀어도 막무가내로 다른 부분 승인을 지연시키면서 골탕을 먹이는 것이었다.
어찌 하다가 그 밸브를 찾게 되어 따져 물었더니 현찰 100만원을 주면 주겠다고 돈을 요구했다.
공장에서 긴급 자재 수급이 필요한 경우 이리 시내 지정된 공급처에서만 구입을 하도록 종용을 해서 가보면 누구가 보냈는지 이름을 물었고 장부에 판매금액과 우리를 보낸 생산 담당자 이름을 적는 것이었다.
이런 먹이 사슬이 말도 못하게 많이 있어서 일일이 다 열거를 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우리가 새로 도입한 생산량 중앙감시 설비가 있었는데, 공장장의 설명으로는, 생산 수율 검사를 하면 한달에 밀가루 60톤과 설탕 40톤씩이 빈다는 것이다.
입고 검사를 부정으로 하면서 허위로 입고를 잡고 실제 공급은 적게하는 방식으로 돈을 빼돌린다는 것이었다.
이를 방지하게 위해 입고 원료량과 생산량을 실시간 측정하는 중앙감시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었고, 오랜 관행으로 부정한 이익을 취해오던 생산직 직원들과 우리 회사간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스템을 설치하고 시운전을 시작하고 나서 자꾸 계측기에 오동작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측기의 불량으로 생각을 하고 교체를 하였으나 낮에는 정상 동작을 하다가 퇴근을 하고나서 밤근무 시간이 되면 불량이 되어 By Pass Mode로 생산을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가서 야간 운영자가 일부러 계측기 선을 빼둔다거나 원료 공급 밸브를 잠근다거나 해서 우리 시스템의 신뢰도를 손상시켜 정상 도입을 방해하는 것이 발견이 되었다.
한번은 최종 생산 박스(쵸코파이 12개 들이) 를 카운트 하는 센서를 설치해서 동작이 잘 되는 것을 확인하고 퇴근을 했는데,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던 시기였고, 퇴근후 새벽까지 술을 거하게 마시고 들어갔다가 집으로 걸려온 전화에 현장으로 불려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여지없이 생산자가 기계를 고장내서 카운트를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전체 생산직원 2~30명과 몇몇 대우엔지니어링 직원과의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 수도없이 새벽에 불려나가고, 밀가루, 설탕 공급설비를 담당했던 기계담당 직원 몇몇은 아예 수동으로 밀가루와 설탕을 별도 통에 받아서 다음날 생산할 준비를 새벽까지하고 아침에 퇴근을 하는 고역을 몇달 동안 반복을 했어야만 했다.
결국 이 재수없는 현장에서 급기야 현장 하도업체 직원 한명이 추락사를 하는 사고도 발생했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장이었다.
신혼 살림을 차린 650만원 13평, 연탄때는(연탄 보일러가 아니고) 전세 마동 주공 아트.
1991년 당시도 형편없이 낡은 아파트 였는데, 최근까지 건재하게 서있다. 재개발 예정이라고 한다.
동양제과 현장 업무가 3월로 준공을 하고 4월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거처를 정해야 했다.
정은이를 출산한 후 영임이는 처가에 같이 지내고 있었지만 서울에 거처가 없었기에 다음 현장 근처로 집을 구해야 할 처지였다.
당이 강원도 진부에 감자 저온창고 설계가 완료되고 현장 파견자를 정하고 있던 시기에 우선적으로 내가 선임이 되어 집을 구하려 진부에 하루 출장을 다녀왔다.
차가 없던 시절이어 이리에서 시외버스를 몇번씩 갈아타고 진부에 가서 발품을 팔며 월세집을 구했으나 당시 거의 시골에 가까웠던 진부읍에서는 방을 구할수 없었고 근처 횡계를 또 수소문 했으나 돈에 맞는 마땅한 거처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강릉에 살던 누나가 임시로 거처를 빌려 줄테니 출퇴근을 할수 있으면 해보라고 해서 일단 대안이 없어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고 4월 18일 2.5톤 트럭을 빌려서 강릉으로 이사를 갔다.
막상 도착을 하고 보니, 월세를 살던 누나가 주인에게 허락도 안 받고 또 식구를 들인다고 이삿짐을 내리고 있는데 고함을 치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할수 없이 그냥 짐만 맡기는 거니까 몇주후에 찾아가겠노라고 겨우 달래고 방에 이삿짐을 구겨 넣였다.
이리에 갈때는 달랑 박스 몇개, 가방 두어개로 시작한 신혼 살림이 그새 많이 불어 냉장고, 세탁기, 식탁, 책상 등등 가구가 제법 늘어있었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임시로 처가에 거주를 하면서 차를 처음으로 사게 되었다.
대우 르망 2년 된 중고를 월부로 구입을 했다.
지방에 살면서 식구가 들어 차가 없이 생활하기는 많이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몇달 사이에 진부에 파견될 담당이 바뀌게 되었다.
구미에서 전기/계장담당 팀장이 진부로 가면서 다른 직원을 선택했고 나는 온양의 연세유업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2년 간의 생활이 바야흐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현장이 천안과 아산의 경계에 있었고 천안은 교통이 복잡하고 집도 좀 비싸고 환경이 온양에 비해 좋지 않아 온양 근처에 집을 구하기로 했다.
온양 시내 부동산을 통해 예산에 맞는 집을 몇채 봤으나 여러가지 조건이 열악했다.
기차길 옆이거나, 빛이 들지 않는 집이거나, 시장 한 중간에 있거나, 여관촌 근처거나, 큰 찻길 옆이거나…
갖 태어난 아기를 키우기에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지역을 온양 시내 이외의 곳으로 넓여야만 했다.
온양에서 현충사 방면으로 강을 건너자 마자 논 한가운데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주인 집과 분리된 이층 독채로 방이 두개에 조건에 비해 값이 싸보였다.
그래서 집을 보러가게 되었고, 결국 주인에게 사기를 당하게 되는 데…
집 구조가 옛날 연탄광과 화장실을 별도로 짓고 그 건물을 통해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있어서 좀 아이를 키우기 좀 위험해 보였지만 독립된 공간이라는 장점과 테라스를 마당같이 쓸수있는 점등이 좋아 보였다.
집 내부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살고있던 세입지가 있었는데, 이것이 작전인걸 나중에 알게되었다.
방 두개를 보고 부엌 구조를 보고 화장실을 보려고 하는데, 안에 사람이 있었다.
화장실 구조가 기억자 모양이어 왼쪽으로 꺽여 들여간 부분이 보이지 않는데 살고 있던 사람이 벽을 보고 서 있는거였다.
볼일을 본다면 문을 닫았을 텐데 문이 열린채 주춤주춤서있는 폼이 좀 어색했지만 설마 변기가 없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주인이 강제로 시켜서 세입자에게 화장실에 서 있게 했고, 세입자는 다음 세입자가 또 자기처럼 속아서 들어오는 걸 알지만 그렇지 않으면 방을 빼서 돈을 받을수 없기에 우리를 보고, 이그 불쌍하것들, 미인하지만 나도 살려니 어쩔수 없다 라는 표정으로 서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부동산에 들려 전세 계약을 하고 며칠후 강릉 누나네 집에 맡겨 두었던 짐을 짐을 싣고 원주에 들려 전세 잔금을 찾아 부랴부랴 내려왔다.
이삿짐 트럭의 도착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정말 열심히 달려 도착을 한후 시간이 지체되어 기다리던 이삿짐 트럭 운전사는 허겁지겁 짐을집앞 공터에 던지다시피 내려두고 떠났는데 부슬 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일단 젖으면 안될 짐을 부랴부랴 이층으로 옮기고 있는데 주인집 아이들이 나와 자잘한 짐을 들고 거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에서 주인집 아주머니인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에게 당장 들어오지 않냐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이런…. 세입자가 새로 이사와서 비를 맞고 이삿짐을 옮기는데 내다보지 않는것도 이상했는데, 그나마 자잘한 손들이 도와줘서 고마웠던 차에 아이들을 소리질러 불러들이다니….
다행이 착한 주인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세탁기와 냉장고를 집어넣을 수는 있었고.
그 이후 아래에서는 우당탕 부부싸움 소리가 났는데… 왜 비를 맞고 지랄을 하냐며 남편을 잡는 아주머니 목소리에, 아 정말 질렸다 싶었다.
할수 없이 야외용 깔개 비닐을 찾아 펼쳐서 이삿짐 위에 덮어서 돌로 눌러두고는 빗속에서 혼자 이삿짐을 몇시간에 걸쳐서 날랐다.
그러다 번뜩 이사를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세탁기를 들여놓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변기가 없는 거였다.
아니 그럼 갖난 애기를 키우는데 변기가 집안에 없다면, 화장실은 도대체 뭐를 쓰라는 거지?
애를 두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다?
그럼 계단 아래 화장실? 그것도 푸세식 화장실?
이런, 20세기 말 푸세실 화장실이라….
아주 어렸을적 부산에서 일식집(적산 가옥)에서 산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수세식 화장실이 생기기 전이었고, 일식집은 재래식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구조였다.
그때 일을 보다가 잠이 들어 변기통에 빠졌는데 팔이 걸쳐저 죽지 않았던 트라우마가 있는데 화장실이 집안어 없다니….
계약을 취소해야 하나마나를 한참 고민을 했다.
결국, 이리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갔다가 온양으로 오게된 힘든 사연으로 말미암아 또 이사를 가야하는 끔찍함과 재래식 변기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눌러 앉기로 결정을 했다.
그렇게 2년간의 온양 생활이 시작이 되었다.
다음은 충청도 사업 이야기 – 대천 방조제
그때 살던집 사진이 없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구글 스트릿뷰에서 찾았다. 감격이다.
어르신 왼쪽 작은 건물이 재래식 화장실과 연탄광. 그위 계단이 2층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 갖난 정은이를 매일 안고, 업고 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우리 결혼 30년동안 제일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다.
천안 하수처리장의 감독관이었던 천안시청 기술직 공무원한테 대천 방조제 수문제어 시스템에 관심이 있는지 문의가 왔다.
그 감독관의 고등학교 친구가 대천 근처의 주포면에 현지 건설 업체인 대산 건설이 시공중인 방조제 공사의 전기담당자였는데 입찰을 앞두고 견적을 받고있는 중이었다.
대천이 이름을 보령으로 바꾸기 전에는 보령군과 대천시가 별도 행정 구역이었다.
천안에서 차를 몰고 주포면 현장을 방문해서 그 담당자를 만났는데 이름이 김충환이라는 세살 위 선배뻘이었고 생긴모습과는 다르게 집에 난을 200여개 치고있던 아주 섬세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워낙 자주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 술도 자주 마시고, 삽교에 있는 그 집에 가서 밥도 자주 얻어먹었다.
이 오래던 1993년 프로젝트가 16년 이후 리먼브러더스 사건으로 북미의 경제가 폭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여 모두 집에서 놀고있던 시절에 구제가 되어 현장으로 발령을 받아 고생은 정말 말도 못하게 많이 했지만 나름 현장 경험과 짭짤한 수입을 일년간 유지하고 그후 다시 씁쓸하게 떠나야 했던 Hatch로 다시 화려하게 복귀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은 역간척이라고해서 예전에 농지를 넓히기 위해 막아두었던 방조제를 다시 허물고 갯벌로 돌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하지만 당시 땅떵어리가 좁았단 남한에는 주로 서해안을 중심을 엄청난 양의 간척사업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대천 방조제도 그 연장선상에서 농지와 농수로 확보, 해일피해 대책등을 목적으로 간척지를 댐으로 둘러 막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발주자 및 설계 감리는 농어촌 진흥공사 충남지사였고 시공자는 대산건설, 운영자는 대천 농지개량조합이었다.
수문은 8개로 구성된 북쪽 1갑문, 3키로 떨어진 남쪽에 4개로 구성된 2갑문으로 총 12개였으며 93년 당시 1갑문 시공을 바로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기술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배수 갑문은 밀물시는 막아두었다가 썰물시 민물의 수위가 높아지거나 하면 하루에 두번씩 개방을 해서 수위 조절도 하고, 홍수시에는 물을 저장하다가 썰물시 배출해서 수위 조절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배수 갑문은 폭이 5미터, 높이 3미터 정도되는 철제 구조물로 무게가 수십톤이 넘게 나가는 중량물로 바닷물의 부식문제, 염해 피해를 막기위한 누수방지등 기술적으로 간단한 설비는 아니었다.
또한 무거운 철제 구조물을 균형을 유지하면서 들어올리지 않으면 갑문가이드에 문이끼여 고착이 되어나 가이드에 손상을 주는 이유로 정밀 제어가 필요했지만 당시 삽교호, 아산호 등에서 사용중이던 권양식으로는 정밀 제어에 한계가 있어 틈새를 좁게 만들수 없어 바닷물의 침투를 완전히 막을수는 없었다.
담수량이 많은 대형 호수의 경우 바닷물이 일부 섞여 들어와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으나 대천방조제의 경우 담수량이 적어 바닷물이 섞일 경우 농지에 바로 염해를 입히기 때문에 누수는 큰 문제였다.
그래서 새롭게 유압실린더를 사용한 정밀 제어 방식을 도입했는데, 그 설계 과정에서 유압제어 장치와 갑문을 공금하던 업체와 발주처 사이에서 신기술을 적용하면서 실수로 누락된 부분이 나중에 계약후 발견이 되었다.
우리가 견적을 낸 부분은 단순히 수문을 개폐하는 원격 조작기능과 개폐 상태를 감시하는 원격 설비였으며 유압유닛과 실린더 위치를 정밀제어하는 부분은 별도 현장에 설치가 되어야 했으나 설계 실수로 현장 제어유닛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계약서에는 상세부분이 없어 사인을 한 이후 이문제를 발견해서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는데 배경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초기 설계는 모타의 힘으로 수문을 감아올리는 권양식으로 제어의 입장에서는 상승/정지/하강 세가지 명령만 내리며 수문의 위치를 0~100% 지시계에 의해 원격으로 감시를 하는 설비로 단지 당사의 업무는 전기 권양기와의 아주 간단한 몇가지 인터페이스로 구성이 되어있다.
당시 설비의 구성은 피아노형의 조작테이블, 14인치 컬러 모니터, 모자잌 그레픽 판넬로 공사 금액도 9500만원 (현 시가로는 약 9~10억정도의 가치)의 간단한 설비였는데 막상 수주를 하고 각 공급 업체들이 모여 상견례를 하고 업무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권양식 수문이 유압식 수문으로 변경이 된것과 유압 제어장치 현장 제어반이 삭제된 부분 (농진공의 실수로 당사 조작반에 그 기능이 포함된 것으로 착각한 것으로 판단 된다)이 발견이 되었다.
이 문제점은 상당히 큰 부분으로 계약 조건에 포함 되지않은 변경으로 인해 계약을 파기시킬수 있는 내용이었으며 이를 본사에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뒤어서 모종의 작업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계약을 파기할 경우 그 작업에 관여된 당사자에게 피해가 예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체면 치례로 보인다만 – 예를 들어 높은 분께서 어렵게 청탁을 위해 힘을써 주셨는데, 알고보니 계약이 잘못 되어 없던 일로 해야겠다, 또는 문제가 있으니 담당자에게 계약 금액을 조정하도록 다시 전화를 해서 힘을 써달라, 이런 부탁을 위사람에게 한다는 자체가 일종의, 당신 무슨 일을 그 따위로 처리했어? 라는 질타로 연결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진행 시켜야만 했다.
결국은 계약 구조 자체로 찍어누르는 당시 소위 갑질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유압제어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권양식 모터제어반에 들어갈 간단한 Programmable Logic Controller 가 갑자기 유압제어를 직접 해야하는 복잡한 장치로 탈바꿈이 되었으며 이 부분을 빠듯한 예산 안에서 구겨넣기 위해 당시 창업이후 신규사업에 목말라있던 업체와 연결이 되어, 정말 턱도없는 금액에 외주계약을 밀어붙이게 되었고, 당시 같이 프로젝트를 담당을 했던 민영기차장 (내가 들어본 노래방 노래중 가장 형편이 없었던 분이셨다.)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 프로젝트로 말미암아 회사에서는 저가 수주에 대한 핀잔과 끝없이 이어지는 현장 문제점으로 인한 추가 인건비 투입, 그리고 당시 나와의 관계(나는 갑이었다)로 중간에 끼어 거의 사람 몰골이 아니게 될 정도로 힘들게 같이 프로젝트를 수행했었다.
사실 이 건으로만 별도 책을 반권 정도 쓸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으며, 상세한 내용은 오늘의 주제에서 약간 벗어남으로 이쯤 하겠다.
그렇게 엄청나게 적은 돈으로 수주한 엄청나게 복잡한 프로젝트를 오랜 시간에 걸쳐 마무리 하고 다시는 대천을 향해서 xx도 누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징하게 힘들었던 프로젝트 경험이 16년이 지난 2009년 가을에 크게 발휘를 해서 실직 위기에서 구제가 되는 일이 생겼다.
2009년 Diary Number #21-31 ~ #22~32에서 한번더 자세히 언급을 하겠다만 간력히 말하자면 당시 2008년 리만 브라더스 사태로 추진중이던 프로젝트가 무수히 캔슬되어 70%가 넘는 잡이 사라졌으며 그때 실직을 한 경우 1년 넘도록 잡을 찾지 못해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15명 정도의 인원이 현장에 불려 올라가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으나 단 3명만 선택을 받을때 3~4년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사람을 대신해서 유압제어 장치 설계경험이 있는 내가 선택이 되어 현장 준비와 현장 업무 1년을 포함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안전하게 살아남은 놀라운 일로 연결이 되었다.
오 주여!!
둘째 출산을 앞두고 탁익성대리의 결혼식이 2월 20일에 잡혔다.
예정일이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아 큰 걱정은 안하고 결혼식을 향했다.
결혼식장이 장모님 사시던 방이동 교통회관이어 주차 문제도 있고, 장모님도 뵐겸 처가에 들린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당시 손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어 영임이 양수가 터진 사실을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모르고 있다가 처가로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고 부랴부랴 결혼식장에 들려 부조금만 전하고 장모님과 다시 온양으로 내려와야 했다. 과속을 하며 밟고 밟아 집에 도착해 보니 마침 아버지께서 영임이 전화를 받고 집으로 들어서고 계셨고 방에 들어가니 영임이는 전화기를 붙들고 양수가 터진채 방에 쓰려져 있었고 22개월 된 정은이는 엄마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부랴부랴 영임이를 들쳐업고 병원에 도착해서 분만실에 집어넣고 5분도 되지 않아 의사가 나왔다.
아예 그냥 집에서 낳지 그랬어…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분만장갑을 벗으셨다.
정말 몇분 사이로 차에서 출산을 할 뻔했던 아슬아슬한 경험…
그래서 상준이 생일이 되면 탁익성 상무 (신입 사원때 온양에서 우리집에서 결혼 전까지 8개월을 같이 살아 정이 많이 들었다. 벌써 상무라니 많이 컸다 ㅋ)에게 가끔 톡을 하곤 한다.
결혼 기념일에 뭐 하냐고…
그렇게 태어난 상준이가 올해(2021년) 27살이 되었고 한창 연애중이다.
그렇게 멀거니 엄마를 지켜보던 정은이는 29살이 되어 이제 30을 바로 몇달 앞으로 내다보고 있다.
별도 가족 앨범과 자녀 성장 앨범을 참조 바란다.
1991년 (다이어리 #4-4) 여름 현장업무를 시작한 이후 3년 4개월 만에 본사로 복귀를 하게 됨에 따라 이사를 가야했다.
익산의 동양제과, 온양에서의 연세유업, 천안 하수처리 공장, 대천 방조제, 한국 야쿠르트 프로젝트를 마치고 장기 상주 프로젝트가 없어져서 바로 다른 현장으로 옮길 수도 없었고, 본사에서 많은 프로젝트가 새롭게 시작됨에 따라 본사에서 기술 영업을 맡아서 해야했다.
문제는 빠듯한 월급과 출장비로 저축을 하지 못해서 서울 근처로 전세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결혼 자체를 신용카드 30만원 긁어서 시작한 터라 항상 빠듯한 생활에 먹을거, 돌아다니느거는 너무 좋아하는 삶의 방식으로 쪽팔린 얘기지만 저축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사실 아래 6의 첫째, 네째, 다섯째 항목은 그나마 쪼개고 쪼개서 적금, 청약저축, 생명보험을 들어두기는 했었는데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처형, 동서 형님들과 약간의 자금을 부모님으로부터 지원 받아 1900만원을 긴급 조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위와 같이 불과 4주간의 기간 동안 당시로써는 큰 돈이었던 1900만원을 아슬아슬하게 마련하여 이사를 과천으로 이사를 가게된 스토리는 나에게 가슴 찌릿한 기억으로 아직 남아있다.
당시 사무실이 여의도에서 시작하여 내가 현장 갈 즈음에 마포에 있었다가 포이동 동원빌딩으로 이사를 최근에 해서 통근이 편리한 과천을 택했고 이후 사무실이 분당으로 이사를 간 이후에도 그렇게 멀지 않게 출퇴근을 하게 된점, 정부 청사의 소재로 인해 치안이 좋아 자녀 양육에 유리했고 문화 활동이 많아 나름 한국 살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과천시절이었던 거 같다.
문제는 과천의 학군 구조가 서울과 달라 경기도 학제를 따르면 중학교 갈때 시험을 봐야 했고, 그래서 초 3정도부터 선행 학습을 하면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점, 전세가 비싸서 좁은 집에 살아야 하는 점이 사실 이민을 더욱 부축인 부분이 있다.
다음 몇번의 다이어리에서 약간 과천에서의 삶을 좀 다루고자 한다.
상준이 어릴때 5층 계단을 1살, 3살바기 둘을 데리고 장보러 다니고, 병원 다니고, 마실 다니고 할때 키작은 영임이가 고생고생 한거 또한 쉽지않은 삶이었고..
특히 학교에서 왕따 당한 정은이, 사고뭉치 상준이를 키우는데 나는 잦은 국내, 해외 출장에 영업 접대에 부서, 팀 회식에 집에 제때 들어가본적이 거의 없고.
정말 그때는 아주아주 나쁜 남편이었다.
나중에 캐나다 가서 아버지 학교 간증할때 이때를 떠 올리며 많이 울기도 했었다.
오 주여…
1989년 2월, 처음 이용로 과장님과 시작된 두명짜리 미니 팀에서 일이 점점 많아지고 팀이 7명으로 늘어나면서 해외 현장도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생긴 해외 현장이 직전 글에서 소개한 베트남 하노이의 CRT (Cathode Ray Tube – TV의 브라운 관)공장으로 당시 같이 건설 중이던 대우전자 하노이 공장에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부품 공장 설비였다.
1990년 처음 발령받은 구미의 공장을 그대로 베트남에 카피를 하는 공장이어서 내가 당연히 파견 1순위에 올라 있었으나, 진부 감자창고와 마친 가지로 전기 담당 팀장이 자기 입맛(동향 ㅋㅋ)에 맞는 직원을 골라 가느라 내가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80년대 중동 붐 이후 한동안 뜸 하던 해외 프로젝트 시장에서 기전본부로써는 첫번째 대형 해외 프로젝트 였기에 당연 지원자가 넘쳐나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그 이후 계속되는 해외 파견에 대한 불운의 시작 이기도했다.
해외 현장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이런 황금 같은 기회가 어찌 부서 창립 및 개척 멤버였던 박차장에게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었던 것이었을까?
누구는 이렇게 해외 현장에 한번도 못 나가본 박차장이 열받아서 확 이민을 가버렸다고 나중에 말하기도 했었다.
파견 대상에서 제외되고 나서 섭섭함이 많았다.
타이밍도 나빴던것이, 진부 감자창고 이후에 바로 연결이 되는 프로젝트 였고, 1993년 후반부 당시 나는 천안, 온양, 대천 등 충남을 중심으로 무려 7개의 프로젝트를 탁익성 대리와 같이 맡아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인력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었다.
1995년 봄, 과천으로 이사를 온 이후 베트남에서 현장 공사가 거의 마우리 될 즈음 시운전 경험이 없어던 계장 담당자를 지원하고 베트남 현지 직원 교육을 겸해서 출장을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물론 시운전과 교육은 구실이었고, 소위 기전 계측제어사업부 창립 멤버였던 내가 베트남 프로젝트에 이어 프랑스 프로젝트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아닌 양보를 해서 속이 많이 상해있던 차에 일종의 위로겸 보상겸 출장이 맞다고 본다)를 한 상태였기에…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출장을 준비하고, 홍콩에서 트랜짓할때 당시 공산국가 였던 중국으로 잘못 들어간 현장직원의 경험담(이게 어찌 가능했는지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가지만 당시에 실제로 발생을 했었다)등 단단한 해외 출장 교육을 이수한 이후에 단신으로 첫번째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당시 책랍콕 공항이 생기기 이전이었는데 수교후 얼마 되지 않아 직항이 없던 시절이어 홍콩을 경유했다.
홍콩 도심 한가운데 있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착륙이 힘들었던 카이탁 공항에 랜딩을 하게 되는데, 착륙을 위해 고층 빌딩 사이로 비행기 날개가 빌딩에 닿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내려가는데 방에서 부채질 중이던 런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ㅋㅋ. 아래 사진 참조.
5월 중순 이었는데 공항 대합실에 들어가니 공기가 무덥고 습도가 높은게 위도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홍콩과 벳남은 그 즈음이 일년 중 해가 가장 높이 뜨는 가장 더운 한 여름이었다.
짧은 환승 시간동안 공항내 가게에 들려 이것 저것 구경을 하면서 특유의 중국식 Chinglish를 들으며 새로운 세상을 살짝 맛보았다.
Where are you going? > 유 고 웨? ㅋㅋ
다시 벳남 비행기로 갈아 탔는데 또 다른 세상을 향하는 느낌이 스튜어디스에게서 물씬 풍겨났다.
아오자이를 입은 가냘프고 야들야들하게 이쁜 모습의 벳남 여 승무원은 참으로 신선했다.
도착해서 현지 인들을 만나보니 당시 벳남이 도이모이 정책으로 서방으로부터 문명을 개방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 사람들은 너무 때묻지 않고 순진한 모습이었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은 참으로 높아서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쳐다보고 수줍게 웃으며 뭔가 말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하지만 다가가면 수줍게 물러서는 그런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현지인들에게 당시 베트남 교민을 통역으로 세우고 계측제어 일반 유지보수에 관한 몇시간의 교육을 마치고 계측기, 밸브류 들을 해체해서 수리하는 법등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별로 산업이 발달하기 이전이어 아주 고급 인력들을 뽑을수 있어 현지인이 상당히 스마트했던 기억이 난다.
주말이 되어 하롱베이에 여행을 가게 됬다.
워낙 명승지여서 그곳에 가지 않고는 벳남을 여행할수 없다는….
1박 2일의 짧은 여행은 정말 환상적이었는데, 아직도 그때 영임이를 나중에 꼭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고 있다.
언제나 갈수 있으려나..
출장 일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하루는 국부 호치민 영웅의 전쟁기념관을 관광했는데 이는 하노이 관광의 필수 코스로 유명한 호안끼엠 호수와 호치민 생가를 방문했는데 처음으로 나가본 한국 이외의 나라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은 참으로 오래동안 내 머리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래 몇장의 사진으로 그때의 기억을 새겨본다.
1/2
여름에 베트남에 다녀온 이후 겨울이 되자 다른 출장 일정이 잡혔다.
93년 초부터 스멀스멀 이야기가 나와서 한껏 기대를 했던 프랑스에 Oricor-7 Project와 동일한 설비가 들어서기로 되어있었다.
베트남 파견 기회를 한번 놓친것으로 충분하여 이번엔 꼭 이루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던 터에 다시한면 물을 먹는 일이 생겼다.
전기와 계정을 묶어서 한 명을 보내기 위해 전기 경력이 없는 나 대신에 L과장이 선택이 된 것이었다.
두번째 먹은 물의 충격은 정말 컸다.
1986년을 전후해 중동붐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약 10여년에 걸처 중동에 파견이 되었던 당시 대리 이상 고참들은 물론 현지에서의 고생은 정말 어마하게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2~3년정도의 파견 기간동안 당시 집 한채 이상씩의 저축을 할수 있었고, 우리가 입사했던 시기부터는 정말 해외 프로젝트가 말라가던 시기였다.
속된말로 단물 다빤 선배들 이후 개털 세대였다.
그래서 거의 10년만에 돌아온 해외 파견의 기회는 두번다시 오지 않을, 거의 잡지 않으면 도퇴되는 마지막 열차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재정적으로는 중동에 비해 많이 부족해지긴 했다.
갈수록 열악해지는 해외프로젝트 수주전에서 경비절감으로 중동 파견과 같이 크게 돈이되는 출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월급으로 거의 카드 돌려막기 수준으로 버티고 살고있던 시기에 장기 해외파련은, 일단 급여를 고스란히 저축을 할수있는 복권당첨 다음으로는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출장비는 베트남의 경우 물가가 워낙 저렴하여 현지에서 쓰고도 남을 정도여서 한국으로 송금이 가능했다. 그렇게 하면 급여와 출장비 잔여분을 합해 당시 한달에 150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저축할 수 있었다.
이민 준비 당시 과천아파트 가격이 9500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년 출장은 4~5천만원 정도의 목돈으로 아파트 반채에 해당하는 금액을 만질수 있는 거의 드문 기회였다.
그런 베트남 파견 기회를놓치고, 칼을 갈고있던 터에 다시 프랑스 파견 기회를 놓친것이다.
그렇게 몇주에 걸쳐 허탈함을 달래려 술에 절어 살다가 마음을 다잡고 당시 하고있던 10여개의 프로젝트를 열심히 수행했다.
그때는 1995년 가을로 프랑스 프로젝트의 시공이 마무리되고 시운전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현장 담당장였던 L과장(그때 내가 원했던 자리에 출장을 갔던)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했다.
약 1년간 가족과 프랑스 현지에 살다가 홈시크에 한계가 온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은 한국으로 이미 철수를 했고 L과장도 한국이 많이 그리워 시운전이 남은 상태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 자리에 내가 출장으로 마무리 시운전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땜빵 출장이었다. 한편의 가족 이슈가 다른편의 행운이 되기도 했다. 출장 일정은 잔여 업무를 다 해결할 시간으로는 빠듯했던 11월 15일부터 3주간으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출장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이고 너무 원했던 출장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당시 현장은 프랑스와 벨기에, 룩셈부르트 3개국 접경지대로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화의 불길이 프랑스로 번져서 한 동안 석유가 자리를 바꾸기 이전까지 석탄이 산업과 가정에서 모든 에너지원이었던 오랜 기간동안 활발했던 경제가 80년대 이후 석유로 에너지원이 대체가 되면서 많은 침체가 이루어져있던 슬픈 시골이었고, 이에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 경제을 살기리 위해 당시 세계 경영을 모토로 전 세계에 대우전자, 자동차 공장을 지어대던 대우의 공격 경영에 맞추어 한국의 공장을 유치한 것이엇는데, 대우전자 공장이 근처 도시에 건설되기시작했고 TV가 주력 제조였던 대우전자에 핵심 부품인 모니터를 공급할 오리온 전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롱위는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의 영월이나 태백같은 지역으로 파리까지는 차로 5시간 정도, 근처 큰 도시는 메츠, 스트라스부르까지 차로 한 두시간 거리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초기 파련자들은 매 주말마다 가족과 거의 유럽의 모든 곳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 다니기를 1년 정도 한 후에 더이상 갈곳은 차로 10여시간 이상 떨어진 곳만 남은상태에서 한국이 많이 그리워졌던 것이었다.
아무튼 출장은 이루어졌고, 인수인게 받은 잔여업무를 하나 하나 정리해 나가며 주말에는 차를 몰고 독일의 하이델부르트에 혼자 다녀오기도 했고, 기계 담당으로 나와 마찬가지로 땜방으로 현장에 파견가 있었던 R과장과 브뤼셀과 암스테르람에 1박으로 다녀오기도 했고, 업체 직원과 파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잔여업무가 해결이 되지 않은 가운데 출장이 2주가 연장이 되었고 연말이 다가오며 예고 되었던 교통관련 항공, 철도, 버스 노조의 전국 총파업이 다가오게 되었다. 12월 15일에 파리 샤를드골 공항은 이른 연말 여행객과 파업이전 프랑스를 빠져나가른 수많은 인파를 뚫고 겨우 비행기를 타고 무사하 한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때 비행기를 타지 못했으면 한달가량 더 현장에 있었어야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것을 나이가 들고나서야, 여유없이 살던 그 시절을 돌아보며 씁쓸한 웃음을 짖게된다.
그때 당시 있었던 몇가지 기억에 남는 여행 기억과 해프닝을 남기고자 한다.
현장에 도착했을때 먼저 와 계시던 J 현장 소장께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시기 전 현장과 그렇게 멀지 않았던 두곳을 들리기로 했는데 룩셈부르크과 브뤼셀 두 도시였다. 주말에 그렇게 계획에 없던 여행을 하고 남은 시간에 Y 과장과 암스테르담을 가보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룩셈부크, 벨기에, 네델란드는 당시 베네룩스 삼국으로 한국 사람에게는 그저 크나큰 프랑스, 독일에 비해 올망 졸망 붙어있는 조그마한 세 나라여서 여행도 셋트로 해야 하는것이 마치 당연하게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운전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고, 휴게소에서 산 접이 지도에 깨알같이 얽혀있는 로 망을 따라 GPS도 없이 도시와 도시 사이를 운전하는것은 그야말로 지도를 잘 보는 인간 GPS가 운전자에게 미리미리 몇번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어느 국도로 몇키로 가다가 좌회선해서 얼마를 가고….이런 실로 복잡한 지도 해석, 도로표지판 분석, 동서남북 파악등의 과정이 필요했다. 나름 Y 과장도 스마트 했도 나도 지도를 아주 잘 읽어서 크게 길을 돌아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온통 외국어(불어, 독어, 네델란드어) 간판과 지도의 지명을 순식간에 비교하여 길을 바로 바로 결정해야하는 극도의 난이도가 필요한 여행에 그나마 크게 고성이 오가지 않고 1박 2일의 여행을 잘 마치고 일요일 늦게 돌아온 기억이 있다. 이때 운전한 지역은 프랑스 롱위 – 룩셈부르그 - 벨기에 한스 동굴 – 브뤼셀 – 안트워프 – 단호프 – 암스테르담 – 하아렘 (대서양에서 오줌누러) – 다시 암스테르담 – 쾰른 대성당 – 룩셈부르그 - 롱위로 돌아왔다. 무려 이틀동안 프랑스-룩셉부르그-벨기에-네델란드-독일-룩셈부르그-프랑스의 7나라를 지나온 것이다. 참으로 섬같은 남쪽 한국에서 살다가 일보도 못가보고 북한도 당연히 못가보고 중국도 가보지 못한 지역에서 살다가 격어본 유럽은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당시 운전 거리는 1,067키로미터에 운전 시간은 14시간 25분이었다. 한국이라는 좁디좁은 나라에서 살던 우리가 평생에 깬 최장 운전 기록이었다.
(이후 최장 운전 기록은 5~6번 더 깨어지게 되는데, 예를 들어 캘거리-밴쿠버 왕복 2000키로, 캘거리 – 미국 중부 2주간 8000키로, 캘거리 – 덴버 1700키로 당일운전, 캘거리 – 사스캐추원 2일동안 1700키로, 캘거리 – 덴버 왕복 3400키로 등등)
그 다음 주말 중앙감시제어 설비 소프트웨어 업체 직원과 차를 몰고 파리 대사관에 기성실적 증명원에 공증을 받는 일이 생겨 일을 보러 갔다가 직원은 일요일 오후에 차를 가지고 먼저 현장으로 돌아가고 나는 월요일에 대사관 일이 남아 하루 더 남기로 했었는데, 그때도 철도 파업이 부분적으로 시작이 되어 아침 일찍 일을 마친후 걱정이 되어 미리 열차표를 구해 놓고 남은 시간을 관광을 하려고 동역에 들렸다. 그런데 열차 파업이 벌써 시작이 되어 열차는 운행이 되지않았고 한국과 같은 고속버스 시스템이 없어서 현장으로 돌아갈 일이 막막했다. 그때 동역 광장에서 매츠로 가는 임시 버스가 있다는 안내를 보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임시 운행이어 저녁에 배차가 있는지 확인 할 방법이 없었고 당장에 출발하는 버스가 한대 있었다. 지나고 나면, 그때 그냥 적당히 놀러 다니다가 역에 갔더니 기차가 파업을 했고, 그래서 며칠 더 파리에 머물다가 아직도 기차가 안다니고, 그래서 며칠 더 놀다가 역에 갔더니 아직도 기차가 안다니고…..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싫컷 놀수도 있었는데, 어찌나 새가슴이었는지, 기필코 그 버스를 놓치면 인생을 종칠것 같은 불안함에, 한나절이 너 남은 자유시간을 포기하고 버스를 기어코 타고 만 것이었다.
당시엔 개인 전화가 없었고 현장 사무실에 전화가 있어서 먼저 현장으로 돌아간 직원에게 메츠 역까지 픽업을 나와 달라는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기차를 타지 못한 관계로 픽업을 나오게 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였는데… 버스는 무정차였고,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사무실에 아무도 있지 않는 늦은 시간이어서 어느 시골에서 또 황당하게 고아가 될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달리는 버스 운전자에게 몇번을 부탁을 해서 전화를 해야 한다고 징징 거렸고. 그래서 운전자가 불쌍했는지 예정에 없는 어느 휴계소에 잠시 정차를 했었는데, 그때 버스에 타고있던 그 많은 승객들이 처음엔 나에게 툴툴거리던 몇몇을 포함을 해서 거의 모든 승객이 거의 환호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나를 보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사람이 몇몇 있었고 ㅋ.
그렇게 겨우 통화가 되어 메츠 다운타운의 프랭탕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해서 국제 고아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또 지나서 보니, 그렇게 메츠에 도착을 했는데, 현장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그렇게 또 하루를 메츠에서 자고,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 다음날 현장으로 갔어도 인생에 그렇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터인데 ㅋㅋ
그 다음주는 일이 너무 많이 일요일까지 반납을 하고 현장일을 해서 지친 2주를 연속으로 보내고 황금같은 마지막 일요일이 돌아왔다.
어디를 마지막으로 돌아볼까 지도를 들어다보다 하이델베르크가 상대적으로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이때는 운전을 같이할 인간 GPS가 없던 차여서 상세한 운전 계획이 필요했다.
지도를 펴놓고 각 도로 번호과 출구번호, 구간별 거리를 긴 종이에 하나하나 적어서 차의 데쉬보드에 붙어두고 운전을 하고 다녀왔다. 당일 운전거리로 650키로에 아침 8:20분에 출발해서 도착을 9시반에 할때까지 13시간 이 넘는 여행이었다.
별도로 위의 개별 여행 사진을 오려보려고 한다. 시간을 내서.
기렇게 긴 긴 출장과 여행을 기록을 남겨본다.